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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MoYA

불굴의 의지와 용기 보여주다…전장에 도전한 시골 처녀, '오데트 샌섬'



▲1942년 오데트는 특수작전집행부에서 작전 요원으로서 훈련을 받았다(사진=위키미디어 커먼즈)



세계 2차 대전에 뛰어들어 영웅적인 면모를 보여준 여성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영웅 ‘오데트 샌섬’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프랑스의 시골에서 태어나 정의감과 애국심으로 전장에 도전했고 수많은 영웅적 업적을 남겼다.


독일군으로부터 상관인 ’피터 처칠‘과 두 명의 다른 요원을 보호하면서 엄청난 용기를 보여줬다. 샌섬은 조국을 위해 며칠 동안 갖은 고문을 견딘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아미앵의 오데트, 전쟁의 문턱에 서다


오데트는 지난 1912년 프랑스 아미앵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국인 로이 샘선과 결혼해 세 아이를 낳았고 영국 서머셋에서 가족과 평범한 삶을 살던 여성이었다.


그러나 시대의 우연이 그녀를 찾아왔고 그는 도전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연합군 특수작전집행부(SOE)에 입대한 것은 ’우연‘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일이었다.


지난 1942년 전장 정보의 수집을 위해 영국 해군은 프랑스 해안의 사진들이 필요했다. 영 해군은 방송을 통해 이러한 사진을 모집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오데트가 이 방송을 듣고 영 해군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그러나 오데트는 제독사령부가 아닌 전장의 야전 부대로 사진을 보내는 실수를 저질렀다.


잘못 보내진 사진은 우연히도 특수작전집행부의 모리스 버크마스터 대령에게 도달했다. 때마침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는 여성 신병이 필요했던 특수작전집행부에게는 엄청난 희소식이 됐다. 첩보 활동을 하는 데 있어 여성 신병이 남성보다 많은 이점을 지녔기 때문이다.


오데트, 인간 병기로 거듭나다


1942년 오데트는 특수작전집행부에서 작전 요원으로서 훈련을 받았다. 그녀는 한 손 다종 무기술, 낙법, 근접 칼싸움, 경비병 제압법, 폭발물 처리·설치 등의 기술을 배우며 말 그대로 ’인가 병기‘로 거듭났다.


한편 오데트에겐 다양한 알약이 지급됐다. 하루 동안 적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알약은 물론, 절박한 상황에 부닥치면 삼켜야 하는 치명적인 알약도 포함돼 있었다.


훈련을 마친 오데트는 프랑스 전선으로 배치받았다. 그는 당시 상관 ’피터 처칠‘ 밑에서 무선 통신병으로 일했다. 독일군이 항상 무선 신호를 예의주시하고 있어 무선 통신은 가장 위험한 임무 중 하나였다. 하지만 오데트는 약 1년 동안 단 한 번도 발각되지 않으면서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지난 1943년 독일 장교 휴고 블라이셔의 농간으로 오데트는 위기에 처했다.


투옥과 고문 속에서 꺾이지 않은 의지


독일 장교 블라이셔는 '헨리 대령'으로 위장하고 오데트에게 접근해 자신은 히틀러를 반대하기 때문에 연합국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거짓말을 했다. 오데트는 이에 속아 블레이셔를 신뢰했지만, 이 믿음은 결국 배신으로 돌아왔다.


오데트는 상관 피터 처칠과 함께 프랑스 알프스의 호텔 데 라 포스테에서 독일 장교들에게 체포됐다. 이때부터 이들은 다른 첩보원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한 취조를 빙자한 고문에 시달렸다.


오데트는 이 기간에 기적과 같은 용기와 의지를 보여준다. 상관 피터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지휘관이고 그는 부관이라는 거짓말을 했다. 또한 피터 처칠이 윈스턴 처칠 총리의 친척이자, 자신의 남편이라는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에 속은 독일군은 오데트와 피터를 죽이지 않고 협상 카드로 남겨두기로 한다.


오데트의 보호 덕분에 피터는 고문을 피할 수 있었지만, 피터에게 행해져야 될 고문이 오데트에게 부과됐다. 오데트는 수감 기간 총 14차례나 되는 고문을 견뎌야 했다.


뜨거운 인두로 지지고 발톱을 뽑는 등 그녀를 향한 무자비한 고문이 시작됐다. 하지만 오데트의 입은 결코 열리지 않았다. 고문을 받을 때도 입을 다물고 요원들의 행방을 밝히기를 거부했다.


오데트는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고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수감 이후 3개월 8일 동안 벙커로 알려진 어두운 지하 감방에 수용돼 있었고 건강 상태는 날로 악화됐다.


결핵, 이질, 괴혈병을 앓았다. 몸이 약해지고 치아도 흔들렸다.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고 결국 혼수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극도의 고난도 삶에 대한 그녀의 의지와 조국 수호의 도전은 막을 수 없었다.


기적의 생환, 전쟁 영웅이 된 오데트


1945년 5월 전쟁이 끝나면서 독일군 캠프가 초토화됐다. 오데트는 피터 처칠과 함께 거의 2년 동안의 투옥 생활을 마치고 살아남았다. 오데트에게 행해진 비인간적인 고문과 수감 생활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생존이었다.


오데트는 이후 전쟁범죄로 기소된 교도관들과 포로수용소의 지휘관이었던 프리츠 수헤른에 대한 증언에 나섰고 이들은 교수형에 처했다. 또한 오데트는 1947년에 그녀가 목숨을 보호한 피터 처칠과 결혼했다. 이후 1956년 이혼 전까지 9년 동안 세 딸과 함께 가정을 이루어 생활했다.


전쟁에 도전한 프랑스 소녀 오데트는 지난 1995년, 만 82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오데트 샌섬은 용감하게 전쟁을 이겨낸 공로로 지난 1946년에 조지 크로스 상과 대영 제국 훈위를 받았다.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공헌한 업적으로 프랑스 최고의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도 받았다. 그녀는 연합군의 승리에 큰 기여를 한 전쟁 영웅으로 기록됐다.



▲오데트는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고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수감 이후 3개월 8일 동안 벙커로 알려진 어두운 지하 감방에 수용돼 있었고 건강 상태는 날로 악화됐다(사진=위키미디어 커먼즈)



오데트, 도전의 용기와 불굴의 의지를 남기다


오데트 이야기는 지난 1950년 '오데트'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됐다. 또한 작가 제라드 티켈은 1949년에 그녀의 전기를 썼다. 지난 2012년에는 영국 우정 공사에서 샌섬의 우표를 발행했다. 가장 최근에는 래리 로프티스가 쓴 새로운 책 '코드명, 리세’가 발간돼 인기를 끌기도 했다.


전장으로 도전하는 용기와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 오데트 샌섬은 전쟁사만이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청년과 여성들에게 도전과 의지의 중요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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